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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8.23 01. 얼떨결에 시작했다

2010. 6. 9. 18:18 제작일지

19.헉소리난다.

내일 반이다 회의에서 공유할 구성안을 작성하려고 선거 전에 적었던 구성안을 보다가 헉소리가 났다. 선거 촬영으로 대구 가기 직전에 적었던 구성안인데, 그 구성안에서 물어보려고 했던 질문을 아빠에게, 사람들에게 하나도 못 물어본 것이다. 머뭇머뭇 거리다가 그 어느 때보다 스펙터클했던 선거는 끝나버렸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블로그에 제작일지를 쓰고 있다.

나는 왜 선거에 관련된 질문을 못했던 것일까. 안했다기보다는 못했다는 게 맞다. 이상하게 묻고 싶지 않아졌다. 선거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엄마 아빠와 시장 사람들의 생활의 현장에서 내가 하는 정치 이야기는 얼마나 힘이 없는지 반복해서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닥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새벽부터 시장에 나와 드르륵 셔터문을 올리고, 재료를 다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물어봐야 할 것은 분명히 있었는데, 내 마음을 빨리 추스리지 못했다. 잠이 부족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일어난 엄마에게 선거하러 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재취업을 준비하며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포항까지 자전거 타고 간다는 동생에게 진보신당을 찍으라고 하지 못했다.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언니에게 선거에 대한 이야기 조차 못 꺼냈고, 아빠에게 더이상 왜 한나라당이냐고 묻지 못했다. 그 당시는 그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더 파고들걸 싶었다. 조금 더 물어볼걸. 서울로 돌아와서도 궁금한 게 많은 걸 보면 아직 덜 파고든 게 분명한데...하지만 다시 그 상황이 된다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어떤 이야기까지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헉소리 났지만, 더이상 헉소리 내지 않으려면 더!

한가지 확실해진 건 정치인이 전문가들 인터뷰는 안하기로 한 것이다.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선거기간 동안 확실히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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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ox4
몇 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아이템이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제작지원을 받고도 할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자식'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누구를 의식한 것일까?) 죽었다. 국장을 촬영하고 인터뷰를 하라는 친구들의 재촉에 못 이기는 척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녔다. 시청광장에 슬픈 표정으로 모인 그 사람들은 누굴까? 그들에게 김대중은 어떤 의미일까?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그들의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다. 나에게 김대중은 여전히 대통령보다는 김대중인 느낌이다.

대구에 내려왔다. 대구 분향소를 촬영했다. 인터뷰를 하기에 가장 적기라고 또 친구들이 강하게 이야기해서 내려왔다. 찍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뭘 물어봐야 할지, 물어보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몇 번 하다가 별 생각 없다는 대답을 듣고 그만두었다. 국장 마지막 날의 분향소는 한적하고, 공원은 예뻤다. 나는 또 너무 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나의 시점으로 경험적으로 풀어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설명적으로 풀고 싶지도 않다. 깨진 유리창 같은 이미지와 '절대성' '찡그림' '외면' 등의 추상적인 언어만 생각이 날 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우선 아빠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오니 왜 갑자기 왔는지 아빠가 묻는다. 김대중 분향하고 왔냐고 물었다. 안 했다고 하니 거짓말이라고 한다. 나는 김대중편이라고 했다. 말 나온 김에 아빠에게 물어보자 생각하고 김대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빠의 눈빛이 달라졌다.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부리부리한 눈빛이다. 내가 흥분해서 이야기할 때처럼 아빠도 높아진 톤의 목소리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엄마는 그런 우리를 보며 또 시작이라면서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갔고, 나는 아빠의 논리를 치고 들지 못했다. 그것은 정확히 조선일보의 논리였고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그 프레임은 아빠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이야기처럼 아빠 나름의 확고한 것이었다. 어디서 그것을 깰 수 있을까? 아니 깨야만 하는 걸까? 혼란스럽다.

아빠는 김대중의 사상은 큰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아빠가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는 근본은 남북 관계였고 공산통일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이 남북평화를 위해 한 일들은 좋은 일이긴 하나 국민의 여론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이명박의 미디어법은 여론이 조작된 탓이라고 했다. 김대중의 여론도 조작된 것일 수 있지 않냐는 것에 그럴리 없다는 논리. 당연하다. 아빠 주위엔 그런 사람이 없었을테니까. 그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아빠의 논리는 뭐냐고 하니까,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생각이 맞아서 그렇다고 했다. 부자들 위한 정책 밖에 없는데 왜 지지하냐고 하니까, 부자들이 부자들 위한 정책하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니도 니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건 아깝지 않냐고. 부자도 마찬가지라고. 아빠가 아까 말한 정치는 자기가 잘 살고 이웃을 잘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그럼 정치인들은 그러면 안 되지 않냐고 하니까 정치인들도 다 똑같다고 했다. 그럼 우리는 부자가 아니니까 부자 위한 정책하는 한나라당을 지지 안해야 되지 않겠냐고 하니까 지금은 부자가 아니지만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서 아빠가 읽는 성경에는 부자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나오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면 이야기는 끝이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TV에 나왔고 아빠는 사상은 크지만 한계가 있다고 다시 말했고 결국은 빨갱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노벨 평화상도 오버된 것이라고 했다. 이명박이 나중에는 더 크게 평가 받을 것이라고 했다. 단호하고 결단력 있게 남북관계를 진전시킬거라고 했다. 사이사이 촛불 집회도 언론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했다.

아빠와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흥분하지 않고 아빠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전엔 나도 흥분해서 싸우다가 동네 떠나가는 줄 알았다. 싸운다기보다는 아빠와 나는 그 논쟁을 즐기는 편이었다. 답도 안 나오는 답답함을. 엄마는 걱정스럽게 쳐다보았지만 간간이 서로 웃기도 한다. 엄마와 외출하려는 아빠가 현관 문고리를 잡고 계속 이야기하고 나는 누워서 계속 물어보았다. 아빠의 정치뿌리가 궁금해서. 결과적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김대중은 결국 빨갱이라는 두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 간간이 책에서 봐왔던 보수의 논리를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들을 수 있을지 몰랐다. 거기다 아직 기독교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니. 아빠는 문을 닫고 엄마와 나갔고 나는 웃음이 나와서 누워서 웃다가 까먹을까봐 블로그에 적고 있다.

내일 거리 인터뷰를 하는 것이 좋을까? 뭔가 다른 기획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굉장히 강하게 든다. 새로운 프레임은 무엇일까? 아빠를 이용하지 않는 것, 아빠를 멍청하게 보이게 하거나 말이 안 통하는 꼰대로 보이게 하는 순간 (실제로 그럴지라도) 이 기획은 필요 없어진다. 나는 아빠를 움직일 수 있는, 아빠의 생각에 틈을 낼 수 있는,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라도 할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방법은 잘 모르겠다. 여튼 아빠와 대화를 주요한 컨셉으로 하는 기획은 힘들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재밌을수도 있겠지만, 남들이 아빠를 이상하게 볼까봐 걱정되기도 한다.

나는 얼떨결에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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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o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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