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8. 14:13 Notice

[기획의도]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나에게는 그게 충격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김대중은 ‘그 자식’으로 불리면서 지나가던 개가 욕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린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김대중은 빨갱이이며,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나라가 망하고, 북한이 쳐들어오고, 북한에서 댐을 열어서 남한이 다 물바다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라의 최고 권력이라는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 자식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반면 내 옆에 있던 아빠는 불만을 넘어 낭패감 같은 것을 내보이고 있었고 동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살던 곳은 대구였고, 기뻐서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 가득한 곳은 광주였다. 저 사람들은 왜 환호할까? 거기서 시작된 기획이다.


그 순간의 충격 때문인지 나는 그 후 아빠의 말을 의심하는 일이 많았다. 성인이 된 후 아빠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졌고, 아빠와 다른 신문을 구독했다. 아빠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방문을 쾅 닫는 일이 많아졌다. 25살이 되면서 서울에 살게 되었다. 독립다큐멘터리를 하게 되면서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보수적인 도시 대구에서 벗어나 내가 동의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우리 아빠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50대 수구 꼴통 대구 아저씨가 우리 아빠다. 사람들은 대구 아저씨들은 죽기 전에는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면서도 씁쓸한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물론 나의 아빠는 조선일보를 구독하며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그 입장이 변할 여지가 없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나를 키워주고 나를 가장 예뻐해 주는 사람 또한 아빠이기 때문에 마음 편히 웃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 아빠는 정말 이 사회가 진보하는데 해로운 존재인 걸까. 나 역시 대구에서 계속 자라고 김대중이 대통령 되던 그 날을 포함한 몇 몇 정치적인 순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동네의 분위기를 따라 한나라당 지지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두 가지를 알아보고 싶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김대중이 당선되던 날 내가 받은 충격을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은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깨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특히 정치)이 어떻게 자기의 것이 되었는지 끊임없이 물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알고 싶은 두 가지는 가난한 나의 아빠는 어떻게 해서 보수정당을 지지하게 되었느냐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배반한다는 아빠의 투표행위가 바뀔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아빠의 생각마저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나의 오만함에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아빠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가장 크다. 지역감정, 대구의 특색, 종교, 보수언론, 현 정권, 가족관계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주제들이 얽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아빠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내가 지금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의심해보게 되면 좋겠다. 또 관객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봄으로써 각자의 위치에서 한국 정치의 현재를 생각해보고, 자신의 정치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더 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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