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특집] 계급과 투표의 고차방정식

[18호] 2010년 03월 05일 (금) 18:30:21 엄기호 info@ilemonde.com

속물주의, 탈정치화 아닌 정치적 계몽의 산물
좌파 언어 탁월해져야 세대의 계급화 가능

 세대는 계급을 대체했는가? 요즘 사회과학에서 유행하는 담론을 찾아본다면 확실히 세대는 계급을 대체한 듯이 보인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비정규직이나 실업이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다. 마치 한 세대 전체 혹은 절대다수가 ‘잉여인간’이라는 동일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 듯한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 투쟁에서도 계급을 대체하는 듯한 세대 담론이 가진 물리적인 힘은 세계 곳곳에서 검증되고 있다. 2006년 프랑스 청년들의 대규모 노동법 개악 반대 시위에서부터 2008년 그리스의 반정부 시위는 명백하게 청년층이 주도했으며 시위의 주제 또한 청년실업과 직결됐다. 서구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홍콩의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 중국 본토와 연결하는 초고속열차 때문에 삶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하며 비타협적 시위를 주도한 것도 ‘80년후’ 세대라고 불리던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적대의 전선이 분명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세대의 문제로 전이된 것처럼 보인다.

 세대는 저절로 투표하지 않아

   
▲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그러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흔히 불러일으키는 오해처럼 경제적 영역에서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 영역에서 ‘노동 없는 가치 창출’ 혹은 ‘노동의 일회성화’라는 자본 축적 방식의 변화에 따라 한 세대 전체가 졸지에 노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될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적대 전선이 자본과 조직화될 수도 없는 잠재적 노동으로서 청년 세대 사이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 경제적 적대가 바로 정치적 투쟁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급이 자동적으로 투표하지 않는 것처럼 세대도 저절로 투표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한국의 20대다. 지난 촛불 시위에서도 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뛰쳐나오는데 왜 20대와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 많았다. 이 때문에 20대에 대한 고전적 탈정치화론에서부터 보수화론까지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20대들은 자신이 언제든 잉여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랑스나 그리스, 홍콩에서처럼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88만원 세대론이 보수주의 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쓰이는 것처럼 자본과 세대 간의 적대가 세대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문화’이다. 경제는 문화를 관통할 때만 정치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88만원 세대가 처한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감각이다.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세대가 계급을 사유하고/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스펙터클의 사회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지금의 20대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속물’이다. 그리고 이 ‘속물’들이 도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세상에 대한 태도는 ‘냉소주의’인 것이다. 인간 모두가 속물인 사회에서 무한경쟁은 인간의 숙명이 되어버린다. 만약 무한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며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가치’라는 것은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대학생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춰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졌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서 지지한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냉소한다.

 

 속물인가, 속물이 돼야만 하는가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해 까발리는 내용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야 한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 자신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꿀벅지’에 이어 ‘말벅지’가 등장했다. 송일국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말벅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내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스펙터클로 치장해야 한다. 스펙터클의 바깥은 없다. 심지어 이번 중학생들의 졸업식 알몸 사건처럼 내가 남을 때리는 것조차도 인터넷에 올려 자랑을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 아니라 속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좌파가 가장 패착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지고 있다. 이 문화 전쟁에서 실패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의 사례다. 1972년 11월 5일 영국 버밍엄의 빈민가 핸즈워스에서 유색인종 청소년 3명이  백인 노동자 1명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언론에서 ‘강도 사건’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영국이 도덕적 위기에 빠졌으며 법과 질서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질서의 적은 바로 이주노동자였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옷차림과 언어를 즐기는 청소년이었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노동당의 무능이 고발되었다. 한편 미조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장악한 노동당에 등을 돌렸다. 대신 그들은 국가를 도덕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처주의의 언어에 동의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전후의 합의에 바탕을 둔 조합주의적 정치가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대처주의로 넘어가는 배경이었다. 노동당은 투표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대처에게 진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로두스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때의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좌파들이 구사하는 대다수 언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알아버린 20대에게는 냉소주의만을 더 강화하는 진부한 성명서 언어만을 반복하는 패착에 빠져 있다. 한국 좌파의 언어에는 정치에 지나치게 계몽된 지금 20대의 냉소적 앎을 압도할 수 있는 ‘탁월함’이 없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진보 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모임과 뒤풀이는 여전히 80년대의 계보학과 ‘깔대기 이론’으로 사람을 녹다운시키고 있다. 탁월함. 이것이 속물과 냉소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핵심어다. 희망은 이 20대가 여전히 탁월함에 대해서 감동받고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김연아를 능가하는 스펙터클로서의 탁월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의 가치에 대한 탁월함은 사이버공간의 웹툰이나 아고라같이 고전적 좌파들이 거의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대가 ‘계급’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고전적 좌파’의 언어가 20대와 단절된 것이다. 속물주의와 냉소주의에 맞서는 좌파의 탁월한 언어가 필요하다. 좌파끼리 만나는 성명성의 언어가 아니라 좌파와 대중, 특히 20대와 만나는 좌파의 상식에 대한 언어, 그것이 우리의 로두스이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글•엄기호
연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권연구소 창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닥쳐라, 세계화>(당대·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2009) 등을 썼다. 

<각주>
(1) 슬로터다이크의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 대한 이진우의 발문 19~2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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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주의 카테고리가 있는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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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표의 망상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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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찰스 부스(Charles Booth)는 개인비용을 들여 12년간 런던 주민을 대상으로 사회조사를 실시했다. 부유했던 그가 이런 조사를 실시한 것은 '런던 노동자 계층의 25%가 극도의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회민주주의동맹(마르크스주의자들의 조직)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구 결과는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사회민주주의동맹의 주장보다 더 많은 35%가 '절대빈곤층'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런던 주민의 생활과 노동>(Life and Labour of the People in London)(총 17권)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의 연구는 "사회정책과 경제과학의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손낙구씨는 1659쪽에 이르는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후마니타스)를 쓰면서 9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찰스 부스가 생각났다고 했다. 

 

"가난한 동네 유권자들의 투표율이 부자동네보다 훨씬 낮다"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 저자 손낙구씨.
ⓒ 남소연
손낙구

'주택자산'을 중심으로 계층과 투표행태의 상관관계를 분석해낸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는 기념비적인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이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 연구를 본 적이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도 "노동운동가들이 운동론에 관한 책만 썼지 서민과 관련한 조사를 한 적이 없다"며 "그런 점에서 이번 작업은 중요한 전환"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손씨는 '타지 주택 소유 여부'와 '거주층' 문항이 추가된 200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행정안전부의 다주택소유자료,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자료 등과 대비해 수도권 1186개 동네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가장 주목받고 있는 대목은 '주택·학력·종교와 투표(선거)의 상관관계'이다. 

 

손씨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집을 가진 사람, 집을 두 채 이상 가진 다주택자, 아파트에 사는 사람, 대학 이상 학력자, 종교가 있는 사람이 많은 동네일수록 투표율이 높고, 한나라당을 택한 비율도 높았다. 반면 무주택자, 단독주택 등 비아파트 거주자, 1인가구, (반)지하거주자, 저학력자, 종교가 없는 사람이 많은 동네일수록 투표율이 낮고, 민주당(열린우리당 포함)에 투표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서울에서 투표율이 가장 높은 동네와 가장 낮은 동네 각각 10곳을 비교해보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2004년 총선과 2006년 지방선거 기준). 전자의 평균 투표율은 67%인 데 반해, 후자는 44%에 그쳤다. 그리고 정당별 득표율의 경우 전자에서는 한나라당이, 후자에서는 민주당(+열린우리당)이 더 높았다. 

 

그리고 전자는 84%가 집을 가졌지만, 후자는 26%만이 집을 갖고 있었다. 전자는 아파트 거주자가 98%이고, 후자는 고작 5%에 불과했다. 대학 이상 고학력자의 경우 전자가 86%이고, 후자는 50%로 나타났다. 전자는 64%가 종교를 갖고 있었지만, 후자는 49%에 그쳤다. 특히 투표율이 높은 부자동네에서 천주교 신자 비율(25%)이 개신교(24%)나 불교(14%)보다 높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러한 결과는 '서민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해 보수정당에 표를 준다'는 '계급 배반 투표론'이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임을 보여준다. 유권자들이 철저하게 계급·계층투표를 해왔다는 것이 손씨의 분석 결과다. 특별히 '가난한 동네' 유권자들의 투표율이 '부자동네'보다 훨씬 낮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 송파구 잠실7동과 구로구 가리봉2동을 예로 들어보자. 아파트 거주자가 100%인 잠실7동은 평균 69%, 무주택자가 77%인 가리봉2동은 평균 45%의 투표율을 보였다. 투표율에서 무려 24%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수도권 전체에 걸쳐 나타났다.

 

이와 관련, 손씨는 "부동산 문제가 악화된 탓에 국민들이 이사를 너무 많이 다닌다"는 점을 들었다. 실제 전체 국민의 55%가 한 집에 5년 이상 살지 못하고 있었고, 셋방 사는 국민의 경우는 그 비율이 80%에 이르렀다. 특히 셋방 사는 가구 중 절반 이상은 최소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는 것으로 나타났다.

 

"2년에 한 번씩 떠돌며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이지만, 투표 참여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에서 현재 살고 있는 동네는 '우리 동네'가 아니라 곧 떠나야 할 곳일 뿐이다. 안정된 동네가 사라지고 정치문제를 함께 이야기할 동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투표율이 오르기는 어렵다. 특히 셋방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투표장에 가야 할 이유가 더 약할 수밖에 없다."

 

이어 손씨는 "어느 정당도 집 없이 셋방에 살거나 혼자 살거나 심지어 (반)지하나 비닐집에 살아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러니 결국 이들이 투표를 아예 포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손씨는 "문제는 계급 배반 투표가 아니라 투표할 이유 자체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정치에 있다"며 "이 점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를 할 경우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정당이 이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투표를 하지 않는 유권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내지 못한 정치 또는 정당체제에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최장집 명예교수는 최근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중요한 건 투표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 즉 정치적으로 대표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괴리와 균열"이라며 "이 투표하지 않은 사람, 즉 '얼굴 없는 시민'이랄까 '침묵하는 다수'의 소리가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를 통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대안이라는 진보정당의 경우 자신만의 확실한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손씨는 "진보정당은 평생을 같이할 임자를 못 만나고 있다"며 "임자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외연확대에 앞서 계층정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음은 지난 10일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손낙구씨 인터뷰 전문이다.

 

"진보정치는 자신이 대변해야 할 사람들에게 '무심'했다"

 

  
노동운동가 출신 손낙구씨가 펴낸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
ⓒ 후마니타스
손낙구

- 왜 이런 연구를 시작했나?

"국회에 있으면서 서민과 관련이 있는 부동산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처음 들여다본 건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인지는 단군 이래 한번도 조사된 적이 없다. 그러다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때부터 거주층을 묻는 질문이 추가됐다. 지상에 사는지, 지하에 사는지, 옥상에 사는지의 질문이 추가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은 어디에 사는지를 알게 됐다.

 

2006년엔가 국정감사를 앞두고 옥상에 사는 사람들, 판잣집이나 움막, 동굴에 사는 사람들과 관련된 자료를 요구했다. 받아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반지하 등에 사는 사람이 160만 명이나 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들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었다. 이것이 던지는 바가 많다. 노동운동도 20년 가까이 했고 진보정치에도 복무했는데, 수도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지하에 살고 있는지 몰랐다. 부끄러웠다. 진보정치가 자신들이 대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이 아니라 '무심'했다.

 

그런 통계를 보면서 이걸 동네별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땅 위에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려면 어느 동네에 얼마나 살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정당이나 사회운동이 지역에서 활동할 때 이런 사업을 우선해야 한다.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정당이나 사회운동을 하면 되겠나?"

 

- 방대한 통계자료를 분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보통 시군구까지만 분석해서 올려놓는다. 그런데 나는 읍면동까지 통계를 뽑아달라고 요구했다. 234개 시군구별로 온 통계를 3573개 읍면동까지 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너무나 궁금했는데 몇 달이 지나서 결과가 왔다. 과천시 문원동이나 강남 세곡동은 35%가 지하에 살고 있었다. 강남구나 과천시는 잘사는 동네인데 지하에 사는 사람의 비율이 제일 높았다. 그리고 강남 개포1·2동은 판잣집, 움막, 비닐집에 사는 사람의 비율이 전국 1, 2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 구룡마을이 있더라. 통계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읍면동별로 보니까 동네 특성들이 다양하게 드러났다. 기존에 생각했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나왔다. 그래서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동네 전체를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담당공무원이 '보좌관님,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고생하냐'고 말하더라. 읍면동까지 통계를 내려면 다른 일은 중단하고 컴퓨터를 4시간 돌려야 한다. 나도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자료를 모았다.

 

앞서 얘기한 통계를 확보하니까 동네를 보는 감이 잡혔다. 반지하 통계로는 감이 잘 안 잡혔다. 2005년 조사 때 타지 주택 소유 여부를 묻는 문항이 추가됐다. 그 항목이 추가됨으로써 집을 두 채 이상 가진 사람이 얼마인지 알 수 있다. 지금 셋방에서 살고 있지만 어딘가에 자신의 집이 있는 '유주택 전·월세 가구'도 새롭게 드러났다. 자기 집에 살든, 친척집 등에서 무상으로 살든, 셋방에서 살든 어딘가에 집이 있는 사람들을 알 수 있다. 주택 소유관계가 정교하게 드러난 것이다.

 

동네를 들여다볼 수 있는 지표에는 인구수, 성비, 학력, 주택소유, 종교, 외국인 비율 등 8가지가 있다. 그런 지표들은 시군구까지만 적용됐는데, 그걸 동네에까지 적용하니 여러 가지 내용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16개 시도 주택지도를 만들어봤다. A4로 350쪽이 돼서 겁을 먹었다. 16개 시도가 이런 정도면 234개 시군구를 하면 몇 쪽이나 나올까? 게다가 3573개 읍면동까지 지도를 만들면 죽을 때까지 해도 못하지 않을까? 자료를 확보해놓고도 엄두를 못냈다."

 

"부자동네는 한나라당, 가난한 동네는 민주당을 많이 찍어"

 

- 특히 강남이 새롭게 보였겠다.

"2008년 총선 때다. 단병호 의원 보좌관이었던 신언직(현 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이 강남갑에 출마했다. 무슨 생각으로 강남에 출마했는지 걱정이 되더라. 그래서 도와줄 생각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가지고 강남갑 동네를 돌려봤다. 그리고 역대선거에서 강남갑 동네별 투표성향 자료가 선관위에 있어서 연결해봤다. 그런데 동네마다 민주노동당 득표율이 달랐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민주노동당 득표율이 조금 높았다. 반면 잘사는 동네에서는 낮았다. 투표소별로 봤더니 20%가 넘는 곳도 있었다. 그런 곳에도 주공아파트가 있었지만 12평, 13평으로 좁았다. 또 셋방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세도 다른 곳에 비해 쌌다. 그런 사람들이 유권자였다. 이들은 재개발이나 재건축도 반대한다. 하지만 대치동이나 압구정동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득표율은 형편없었다.

 

강남 좌파가 다른 좌파가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의 표가 아니라 강남에 사는데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을 찍고 있었다. 강남에 살더라도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그 처지에 따라 투표율이나 득표율도 달랐다. 강남갑에는 집주인보다 셋방에 사는 사람이 더 많았다. 강남에 살지만 셋방에 살기 때문에 집값이 오르면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남에 사는 세입자들의 생활상 어려움을 가지고 강남 서민과 소통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런 강남 서민을 대변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연구를 통해 내린 중요한 결론 중 하나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철저하게 계층·계급투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계급 배반 투표론'이라는 기존의 통념(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서울의 경우 동네 투표율과 8개 지표를 연결하니까 (동네별 특성과 투표율 등의 상관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형편이 괜찮은 동네에서는 투표율이 높고, 어려운 동네는 투표율이 낮았다. 정당 득표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편이 괜찮은 동네에서는 한나라당을, 어려운 동네는 민주당을 많이 찍었다. 다만 민주노동당의 경우에는 상관관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주택, 학력, 종교 등의 지표를 다 돌려봐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깜짝 놀랐다.

 

통계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들은 투표를 많이 하거나 안 하는 것일까? 부유한 사람들이 투표도 많이 하고, 아파트에 살고, 학력도 높은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투표를 안 하는 사람이 많을까? 노동운동할 때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한 비정규직 문제를 많이 제기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통계를 분석하면서 보니까 이 사람들은 이사를 아주 많이 다녔다.

 

투표율은 주거생활 조건과 관련이 있었다. 언제까지 살지도 모르니까 자기 동네가 아니었다. 그러니 동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뿌리 뽑힌 삶으로 살아온 것이다. 결국 국민이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들은 한국 정치를 꿰뚫고 있었다. 부유층과 가난한 사람은 각각 자기 처지에서 정치행위를 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투표 해봤자 뭐하냐' 이런 것이다. 투표를 안 한 동네일수록 민주당 등 야당 지지율이 높았다. 투표율이 올라가면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득표율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투표를 열심히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를 안 하거나 투표를 하면 상대적으로 야당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투표를 안 하는 행위 자체가 뚜렷한 정치행위였다. 자신들을 대변해줘야 할 야당이 투표를 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지 못해 투표를 안 하는 것이다. 투표를 안 하는 사람의 존재, 투표율의 변화는 정치학의 중요한 주제인데 이번 동네 분석을 통해서 투표를 안 하는 사람의 성격이 드러났다."

 

-이번 연구는 수도권에 한정돼 있는데 비수도권에서도 그러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가?

"초고를 넘긴 후에 집에서 비수도권도 통계를 돌려봤다. 수도권에서처럼 딱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주택소유율과 투표율의 상관관계는 높았다. 영남권, 호남권, 충청권을 다 해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수도권 모델'을 전국적으로 적용해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투표율과 주택(자산)을 중심으로 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정당 득표율에선 난관이 있다. 호남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은 3% 정도밖에 안 돼서 그것으로 무얼 해볼 수 없었다. 영남의 경우 2004년 탄핵에 반발해 노무현 구하기가 이루어지면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합치면 20~30% 정도 된다. 지역주의를 개입시키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수도권은 수도권이 갖고 있는 도시적 성격이 반영된 것이다.

 

전국의 읍면동에서 '동'이 붙은 동네는 도시적 특성을 갖는다. 유권자의 80%가 동에 산다. 전국에서 동만 추려 돌려보니까 주택소유와 투표율의 상관관계가 상당히 높았다. 주택 소유와 한나라당 득표율의 상관관계도 수도권만큼은 아니지만 꽤 높은 현상이 발견됐다. 주택소유와 투표율, 한나라당 득표율 세 지표의 상관관계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왔다. 다만 학력이나 종교는 수도권과 달랐다.

 

결론적으로 유권자 80%가 산다는 지역(도시적 특성을 가진 지역)에서 수도권과 닮은 현상이 발견됐다. 이 책이 수도권에 한정해 얘기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3분의 2 정도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투표율이 가장 높은 10개 동네.
ⓒ 후마니타스
손낙구
  
서울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은 10개 동네.

Posted by co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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