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 - 윤상준

영화는 딸의 질문과 아빠의 대답으로 진행된다. 질문과 질문 사이에는 딸 겸 감독의 고민이 흐른다. 포스터의 카피처럼 아빠는 보수, 딸은 진보. 이 둘의 골 때리는 정치 이야기가 영화 내내 계속된다. 영화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은 그런 영화다.

흔한 내용이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을 독자도 한번쯤 겪은 바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대화할 때 느끼게 되는 소통의 어려움. 생각의 차이를 좁히기란 쉽지 않다. 답답하고 지난한 일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냐 셋이냐 같은 논쟁이라면 쉽다. 증명해서 누가 옳은지 가리면 되니까. 하지만 이렇게 답이 딱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영화 속 아빠와 딸의 생각차도 마찬가지다. 보수적인 아빠, 진보적인 딸.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논증할 순 없다.

신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혹은 좌와 우 한 쪽에 서서 생각하는 건 믿음의 문제다. 그것은 시장을 향한 믿음일 수도 있고,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믿고 행하는 실천의 문제다. 이는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영화 속 딸은 아빠에게 <삼성을 생각한다>를 건네지만 그 숱한 비리와 불법도 아빠에겐 ‘사업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일 뿐이다. 딸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사업 혹은 정치를 정직한 방법만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사람이 열심히 살아서 성공할 생각을 해야지 높은 사람들 욕하고 가진 거 내놓으라고 하면 안된다는 말에도 딸은 대꾸하지 못한다. 오히려 답답해한다. 거세게 몰아붙일 수록 더 답답해진다. 그 답답함은 아빠에 대한 답답함이 아니라 ‘올바른’ 생각을 표현하고 설득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답답함으로 보인다.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에.

신념의 차이는 많은 충돌을 가져온다. 인류의 역사가 그랬다. 30년 전쟁은 그 중 가장 강렬했다.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충돌. 30년간 1천만 명이 넘게 죽었다. 나의 신념이 옳음을 보이려는데 그것이 논증되지 않는다면 다른 말을 하는 녀석을 없애버리는 게 상책이고 인류는 그렇게 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소통하려 한다. 한없이 답답하고 지루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아빠와 딸은 생각차를 좁히지 못한다. 소통은 불가하지만 위태롭진 않다. 아빠와 딸.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이들은 그토록 소통하려 하는 것이리라.

사랑. 그렇다. 사랑은 신념을 초월한다.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인연처럼, 그 사람이 좋다면 신념을 넘어서 그 사람과 소통하게 된다. 애정을 통해 종교인조차 신념을 넘어서는데 내가 못할 게 뭐 있을까. 소통이 안돼서 답답했을 때 애정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영화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은 불통의 모습만 보여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소통의 실마리를 던져 준 작품이었다.

Posted by cox4

블로그 이미지
다큐멘터리 작업소
cox4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