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내려왔다. 어제 아침에 내려와서 부모님이 이사하는 걸 촬영하였다. 빚으로 샀던 집을 파시고 몇 년만에 다시 장만하신 집이다. 낡은 아파트이긴 하지만 집을 샀다는 것으로 마음 편해하시는 것 같았다. 굳이 이사를 촬영한 것은 아빠가 가지고 있는 '부'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로 듣고 싶은 것, 그리고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집의 소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정치적인 판단으로 이어지는지를 물어보려고 했었다. 그리고 지방인 대구에서조차 이제야 집을 마련한 부모님의 경제적 조건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어제 아침에 촬영을 하고 짐을 새 집에 내려놓고, 계속 짐을 정리하고 걸레질 하느라 팔이 빠질 것 같아서 인터뷰는 못했다. 내일 아빠가 교회에 갔다오면 할 생각이다. 그래도 촬영하면서 재밌는 게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 그래도 뭐라도 하는구나 싶어서 안심한다는데 우리 부모님은 안타깝게 보신다. 어제도 카메라를 꺼내 아빠를 찍으니 한참 카메라를 보다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아이고 경화야, 서글프다.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고..." 정말 서글픈 표정으로 보더니 돌아서서 이삿짐을 정리하셨다. 찍든 말든 전혀 의식도 하지 않았다. 엄마를 촬영할 때도 느낀 거지만 부모님은 카메라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본다. 다른 촬영을 하면 아무리 친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나를 봐주지 않고 늘 카메라만 보고 의식해서 약간 서운한 적도 있었는데, 이젠 그게 익숙해졌는지 카메라를 보지 않고 나를 훑어보는 아빠 때문에 살짝 아니 사실은 많이 당황했다. 나는 아빠와 대화할 수 있는 레벨이 될까 싶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이삿짐을 정리하던 남동생이 카메라에 많이 잡혔는데 아빠가 종종 사라지는 바람에 동생이랑 카메라를 가지고 놀았다. 김대중하면 뭐가 떠오르냐니까 성대모사를 하고, 군대에서 이명박 찍은 이야기하고, 정치에 기대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동생의 말에 좀 충격을 받았다. 더 큰 충격은 오늘 아침 동생의 침대에서 본 책이다. 나는 내일 서점에 가서 [삼성을 생각한다]를 사서 아빠와 대화할 생각이었는데, 동생이 자기 전에 읽는 책은 이병철 삼성회장의 자서전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돈 주고 산 것 같다. 오마이갓.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걱정이 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동생을 가르치려고 들것 같고, 동생은 설득되지 않을 것 같다는...동생이 많이 찍히는 바람에 아빠를 제치고 새로운 주인공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걱정, 아빠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이 다큐멘터리에 노출 될 가능성. 동생과 형부, 엄마, 아빠 모두 카메라를 부담스러워하기보다는 즐기는 타입들이다. 연기하거나 개그를 하려고 한다. 임신중이라 살이 쪄서 카메라를 싫어하는 언니 말고는 모두 카메라 앞에서 무방비 상태인데 이렇게 찍어도 되는 것일까? 진지하게 다큐멘터리의 기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동의를 받아야겠다만 진지하게 생각해줄 것 같지 않다. 여기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보다는 그냥 좀 다른척하는 가족의 포지션이다. 나의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시다. 흐.

집에서 뒹굴거리고 엄마가 해주는 밥도 먹고 있다보니 긴장이 조금씩 줄어간다. 긴장이 줄면 촬영도 게을러지기 때문에 몸을 조이기 위해서 동생이 알바하는 카페에 나왔다. 이사온 동네는 대구에 처음 왔을 때 살았던 동네다. 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기도 한다.

꾸물거리지 말고 부지런히 촬영하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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