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낙구의 역작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가 향후 선거담론에 끼칠 영향은 아주 클 수밖에 없다. 책을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 몇몇 매체에 실린 북리뷰만 본다면 잘 살든 못 살든 계급투표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이 책 이후로는 기존의 계급배반투표이론, 즉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일수록 보수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설령 하더라도 최소한 몇 가지 전제나 배경설명을 깔아야 가능하게 됐다. 아무튼 계급배반투표이론은 설득력이 떨어지며, 가난한 사람일수록 투표를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물론 이 '실증'에 대한 '검증'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수도권에 한정된 조사라는 점과 극우/보수정당 지지자의 상당수가 자신의 지지를 숨기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 등 여러 요소들이 공정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관련해 박상훈은 "수도권 하층의 불안정한 주거현실이 정치의식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을 한다(<한겨레21> 798호). 일리 있는 얘기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몇해 전에 내가 속한 당의 지역 활동을 왜 나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을까, 아니 열심히 할 생각이 들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개인적인 이유는 '지역정치에 대한 마인드가 후진데다 게을러서'이고, 사회적인 이유는 '언제 이사갈지 몰라서'였다. '지역에 뿌리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은,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울생활 십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불변조건이다. 정치공동체 형성의 조건이 일정기간의 정주라면, 나는 언제나 정치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던 셈이다.

이 책이 도드라지는 지점은, 현행 선거제도나 이를 떠받치는 의사대표원리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계급배반투표 가설 자체를 논파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거관련 담론들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어떤 명제, 즉 '각 계급의 투표율이 대체로 비슷할 것'이라는 명제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계급을 배반한 투표'가 아니라 '투표를 배반한 계급'이다. 과거의 정치가 적대를 드러내고, 조직화하고, 승리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면 현대의 정치가 직면한 문제는 정치적 적대 자체가 증발해버리는(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정치적 적대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과제와 정치적 적대에서 승리하는 과제, 요컨대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각각의 과제는 공히 계급적 관점에서 계급구조의 역동적 현실-flow를 명확히 파악하고 빠르게 업데이트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는 그런 논의의 드물고도 중요한 정초가 될 수 있는 책이다. 또 계속 보완되고 축적되어야 하는 책이라는 점도 물론이다.

사실 책의 내용은 민주당이나 진보정당들의 기존전략과 크게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어쨌든 투표율이 높은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걸 경험칙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계급배반이론에 따른 몇 가지 전략적 고려들을 좀더 줄이고 투표율 제고에 좀더 집중하게 될 수는 있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라는 행위 하나를 하는 데도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한 심리적, 경제적 자원을 소모하게 된다. 불평등은 이 지점에서부터 '이미' 발생한다. 돈 많은 정치공동체와 가난한 비-정치공동체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별시민의 정치적 대표성을 논하는 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명박 찍은 국민들이 개새끼"라고 욕하고 자기 블로그 대문에다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라고 써놓는 등의 짓거리가 무의미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정치적 의사표현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투표율의 저하가 계급과 거주지역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보장되어야할 정치적 의사표현이 아니라 반드시 개선해야할 사회문제가 된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향방'보다  더욱 민감하고 어쩌면 중요할 정치적 이슈는 바로 정치적 의사표현의 '유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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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교수의 논리(오마이 뉴스에 실린 조기숙 교수 의견)는 다음과 같다.

아래과 같은 상황을 가정하자. 부자, 중산층, 서민의 투표율은 각각 80%, 50%, 20%이고, 부자 80%가 한나라당 지지, 의식있는 중산층 중 30%만 한나라 지지, 70%는 민주당 지지, 서민 중 70%는 한나라당 지지, 30%는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치자.

서민은 기존 체제에 포섭되어 한나라당을 지지하지만, 정치적 관심도가 떨어져서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게 바로 조기숙 교수의 주장이다.

     정당 지지율
 
   투표율  한나라당  민주당
 부자  .80  .80  .20
 중산층  .50  .30  .70
 서민  .20  .70  .30

여기에 부촌은 부자가 60%, 중산층이 40%인 동네이고, 빈촌은 중산층이 40%, 서민이 60%인 동네라고 치자. 위의 표에서 가정한 투표율을 적용하면, 아래 표에서 표여지듯, 부촌에서는 68명이 투표하고 투표자 중 48명(=60명*투표율.80)이 부자다. 빈촌에서는 32명이 투표하고 투표자 20명이 중산층이다. 비록 빈촌에는 서민이 많지만 투표자 중에는 중산층이 많다.

   인구    투표자   부촌

빈촌
 
   부촌  빈촌  부촌  빈촌  한나라  민주  한나라  민주
 부자  60    48    38  10    
 중산층  40  40  20  20  6  14  6  14
 서민    60    12      8  4

이들 투표층의 정당별 지지율을 계산하면, 부촌에서는 44명(= 부촌 투표자 48명*.한나라당 지지율 .80 + 중산층 투표자 20명*한나라당 지지율 .30)이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24명이 민주당을 지지하게 된다. 한나라당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반면 빈촌에서는 14명이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18명(=중산층 투표자 20명*민주당 지지율 .70 + 서민투표자 12명*민주당 지지율 .30)이 민주당을 지지해서 민주당 지지율이 높다. 하지만 빈촌의 민주당 지지는 60%를 차지하는 서민들로부터의 지지가 아니라 40%를 차지하는 중산층의 지지에 근거한 것이다.

즉, 서민층에서 한나라당 지지가 더 높아도, 동네별 지지자를 보면 빈촌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더 높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다. 이 논리에 따르면 손낙구씨가 책에서 보여준 <지역별 분석>의 결론과, 여론조사에서 나오는 <개인별 분석>의 결과 모두 가능하다.
Posted by cox4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일은 언뜻 상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같은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한다. 얼핏 분열증 같아 보이는 이 현상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처럼 진보진영의 논객들을 괴롭혀왔다. 논객과 진보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계급적 정체성에 밝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데 분노한다. 그리고 계몽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계몽은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경 제학자들은 인간이 결국에 사사로운 이익관계를 좇아 움직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대부분의 인간은 사익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상식은 머릿속의 상식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수의 진보 운동가와 논객, 정치인들은 선택받은 가정에서 온갖 혜택을 받고 자랐다. 그러고도 분배를 논한다.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고도 집중을 논한다. 앞서 말한 상식이 통했다면 소수의 집중되고 편향된 자본을 위해 종사하는 보수 정당은 절대 집권할 수 없다.

그 같은 상식이 현실의 상식이라면 다음과 같은 권유는 정당하다. - 당신의 주머니를 행복하 게 해줄 수 있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하라. 당신의 주머니를 지지하라는 말은 요구라기보다 질문이며, 이는 곧 당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주문은 헛되다. 왜 당신의 계급에 따라 투표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계몽하는 일은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식의 주문은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귀에다 대고 소리 질러도,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실제 들리지 않는다! 가난한 당신이 이명박을 선택했을 때 당하게 될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도표로 만들어 오른손에 들고, 권영길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될 온갖 종류의 혜택을 도표로 만들어 왼손에 들고 그들에게 외쳐봐라. 당장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난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결국 이명박을 선택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도대체 왜?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요 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적지 않은 부자들이 적당한 부패와 조작과 위장을 즐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그저 부자라면 그 정도는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하게 입신에 성공한 저 부자들은 그만한 권리와 폭력을 응당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것은 단순한 존경이나 예우와 다르다. 겨우 존경심 때문에 사익과 반대되는 선택을 할 정도로 인간의 두뇌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건 우리가 여태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번식하고 경쟁하고 버티고 버텨 살아온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언어의 토대 위에 건설된 탓이다. 사람들은 부자 - 성공 - 상위 3퍼센트 - 대기업 - 수출 - 재벌 - 시장주의 같은 단어들에서 긍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반대로 복지 - 중소기업 - 88만원 세대 - 분양원가공개 등에선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듯한 상실감 따위의 부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시장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고작 '반시장주의'다. 세상에, 얼마나 부정적인가. 그 내밀한 사정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단어와 인식의 틀 위에서 살아왔다. 보수성을 ‘궁극적으로 안전하고 탄탄한‘ 것으로 인식한다.

간단한 예로 TV와 영화 속 가부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짚어보자. 철옹성 같은 권위를 가진 아버지는 온갖 폭력과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결국에 가서 아들과의 화해에 이른다.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관계의 정상화를 이룬다.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이데올로기가 뜨거움과 결합하면서 ‘설명되지 않는 끈끈함’ 따위의 수사로 포장된다. 놀라운 건 대중이 이 같은 광경을 보며 감동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예외도 있다. 그건 그 영화를 만든 자들의 진보성과 현실인식의 탁월함을 증명한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흥행에 실패했다. 간단하다. 사람들은 소위 진보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을 ‘머리로’ 인식한다. 반대로 보수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은 ‘가슴으로’ 인식한다. 따로 학습이나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택시기사 농담’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택시기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정권을 옹호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직 근로자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가부장적인 권위에 목말라 있으며,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실추되는 가정 내 권력에 대해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간단한 이야기다. 택시기사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계급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관과 정체성은 보수주의에 닿아있는 거다. 미국의 고속도로 트러커들 대다수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자칭 진보 정권이라고 불린 두 정부의 집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경쟁이었다기보다, 개혁세력의 안티 담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에 더 가까웠다. 실제 이 두 정권의 정책은 조금도 진보적이지 않았다. 그저 과거와의 단절과 안티 담론의 연장선상 위에서 지루한 말싸움을 해온 것에 불과하다. 가끔씩 진보진영의 수사만 빌려왔는데, 이건 그저 한나라당과 자리싸움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집권은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보수의 언어를 들고 나와 진보의 탈을 쓰고, 이를 뜨거운 개혁의 이미지로 치환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결국 대선 승리의 드라마로 이어졌다. 욕할 게 아니라 공부해야 할 일이다. 그는 진정 언어의 마술사였던 것이다.

많은 수의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 정권에 속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덤을 판 건 진보진영 스스로다. 정권 내내 진보진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의 행동에 옳고 그름의 틀을 가져가 비판했다. 어떻게 부정부패 우익 세력을 지지할 수 있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수적 가치관 안에서 살아왔을 뿐이다. 그 위로 당위성을 겹쳐 놓으면 격렬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아서 보지 못하는 건데, 그에 대해 욕을 하고 보수반동꼴통 소리를 서슴치 않았다. 보수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란 고작해야 ‘쟤들은 안 돼’ 정도였다. 조롱이 팔할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진보진영이 얼마나 그릇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안티 담론에 의해 움직이다간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의 틀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 기껏해야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 취급 밖에 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은 도덕의 황폐화를 부르짖고 세상이 당장 망할 것처럼 시일야방성대곡을 목 놓아 불렀다. 유동적인 중간층은 서슬 퍼런 진보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어진다. 도무지 안정적인 비전을 제시할 그룹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보수진영에선 진보진영의 언어를 가져다가 잘 활용했다. 이회창 후보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천민자본주의, 이거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술자리 안주삼아 실컷 비웃었다. 하지만 언어의 힘이란 무섭다. 불안정한 진보주의자보다는 안정적인 보수주의자의 개혁적 언동에 솔깃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명박 후보도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진보진영의 화두를 고스란히 가져가 자기 언어로 흡수해버렸다. 진보진영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진보진영의 선동가와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 판 무덤 속에 기어들어갔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면 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대중에게 꾸준히 진실을 알리고 보수진영의 부조리를 밝힘으로써 마침내 상식이 통하게 될 것이라 낙관하는 자세는 금물이다. 그 진실은 진보진영에게만 들리는 진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틀에 의해 판단한다. 이 틀은 그들의 세계관이고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은 주머니 사정과 별개로 작동한다. 상식을 운운하면 반감만 산다. 보수진영의 움직임에 일일이 대응하는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가져가다간 결코 집권할 수 없다. 대중이 어떻게 진보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그런 관심 안에서 진보의 가치관과 인식의 틀이 보수의 그것 못지않은 안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진보진영이 입에 문 언어들이 닮고 싶고 갖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패션화 전략도 필요하다. 진보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한국의 진보진영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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